"아이고, 가엾어라. 그래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니?"
"장애인 할인을 받기 위해서죠!" p34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 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극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비극과 희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배역은 성실히 수행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마치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이 된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탁월한 공연자가 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p36
품격에는 최고 품격과 저질의 품격이 있지만, 존엄에는 최고와 최저가 없다. '최고 존엄'이라는 말이 기괴한 이유다. p58
스스로 별다른 통제력을 바휘하지 않아도 허둥지둥 댈 일이 없고, 위급한 일이 발생해도 그를 모시는 사람들이 알아서 모두 해결한다. 그는 현재의 질서에서 최적화된 수단을 이용해 품격 있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p61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가 실재(진실)을 공유한다. 그 공유하는 실재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대등하게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이들은 모두 서로의 연기가 품고 있는 의도를 공유한다. p66
누군가에게 연극적인 삶은 위선이겠지만 누군가는 연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p83
같은 시기 자신의 손으로 절도 있게 혹은 형식적으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었던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모임 푸른잔디회는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는 죽음까지도 퍼포먼스로 삼는 인간과, 가장 열악한 실존을 감내하면서도 살기를 선택하는 자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준다. 전자는 미를 위해,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품격을 위해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후자는 삶을 존중하기 위해 품격에 부여된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가치의 부재를 감내한다. 그러므로 나는 전자를 품격주의자, 즉 품격의 인간이요, 후자를 존엄의 인간이라 말하고 싶다. p88
어떤 부모가 장애아이든 아니든 자녀를 아에 낳을 생각이 없었는데, 의사의 실수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경우를 '잘못된 임신wrongful conception' 소송, 부모가 아이를 낳고 싶긴 했으나 장애아라면 낳지 않으려 했는데 의사가 판단을 잘못해 장애아를 낳은 경우를 '잘못된 출산wrongful birth' 소송, 의사의 판단이 틀려 부모가 출산한 장애아 스스로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를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부른다. p97
그러나 최신 생명공학기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자녀와 관련한 여러 조건을 선택하고 있다. 자녀를 낳고 양육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 상대방이나 성적 파트너의 키, 피부색, 지능, 외모 등을 알게 모르게 따지고 있을 것이다. 그저 이와 같은 선택 행위가 생명공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더 정교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 큰 키의 자녀를 원하는 것처럼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p101
물론 이 험한 세상에서 장애까지 가지고 사느니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피해'를 입은 상태라고 말하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p117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농인이 아닌 아이들은 그전까지 '정상적인 부모가 결여된' 장애 가정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에는 자신을 '농인 부모의 자녀들'이라는 뜻의 영문 축약어인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부른다. p125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의 기지 넘치는 논증이 잘 알려져 있다. 신이 없다고 믿었다가 있으면 낭패이지만, 신이 있다고 믿었다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신이 있다고 믿었다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신이 있다면, 그것처럼 잘된 일은 없다! 파스칼은 그러므로 종교를 믿는 편이 낫다고 결론 내린다. p138
정신의학의 진단 기준에 부합하는 증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강제입원 과정에서 겪는 트라우마는 상당하다. 강제입원 과정은 무엇보다 한 사람이 철저히 '물건'처럼 취급되는 긴 절차다. p167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 p201
정신장애인이어도 괜찮지만 정신장애를 티내지 말고, 청각장애인이어도 괜찮지만 수어는 쓰지 말고, 노인이어도 괜찮지만 젊은이같이 행동하라는 요구(커버링 요구)에 추상적인 헌법 규정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p236
지민은(나는) 종종 몸뚱어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만이 진짜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닐까 생각했다. 신체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은 낭만적 사랑으로 더 쉽게 돌진하고, 나아가 그런 인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정의롭고 윤리적일 때 그 아름다움은 더욱더 빛났다. p255
디보티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을 '디보티즘devoteeism'이라 부른다. p257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성적 도착이나 병리적 수준의 페티시즘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여성의 가슴이나 남성의 떡 벌어진 어깨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의 취향을 두고 정신질환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검은색 스타킹을 보고 흥분하거나 팔뚝에 드러난 힘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취향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때로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정신질환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장애가 있는 신체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질환으로 분류되어야 할까?" p259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 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들로 가득 차 있다. p266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p267
하지만 사진이 아니라 초상화라면 어떨까? 초상화는 사진과는 다른 양의 시간을 구현한다. 사진은 하나의 순간을 드려내고, 바로 그 순간 개인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반면 초상화는 긴 시간에 걸쳐 한 사람의 모습을 담는다. 사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음악에서 한 부분의 음을 떼어내 들려주는 것과 같다면 초상화는 그 사람이 그동안 보여준 여러 특징과 모습을 겹겹이 농축시켜 한번에 화음처럼 '들려'준다. p274
법철학자 마사 미노우는 정체성 정치가 개개인의 상황을 지나치게 특정한 집단 정체성으로만 축약하며,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정체성과 상호 교차한다는 점을 무시하고,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분선들이 현대 사회에 들어 해체되고 있다는 점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과거에는 장애였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게 될 수도 있고, 장애가 없는 사람도 노년이 되면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호 교차성과 비일관성을 정체성 정치는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 p302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p313
1.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책을 추천 받아서 읽는 건 참 즐겁다. 책을 고를 때 보통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칸을 살펴보거나 나의 취향이 반영된 책들(내가 좋아하는 작가, 내가 좋아하는 분야)을 위주로 읽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결국 비슷한 책만 연달아 읽게 되서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가끔씩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냐고 물어보는데 그 때 상대가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하고 책 한 권을 추천해주면 속으로 빨리 읽어보고 싶어서 기분 좋은 안달이 나는 것 같다. 다만 쉬운 책은 아니라서 마음에 비해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느렸다.
2. 이 책의 저자는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변호사 김원영이다. 그가 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출신 변호사임을 생각하면 '그 가운데서 진동하듯 살면서'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그가 직접 '실격당한 자'로서의 삶과 그가 바라보는 '실격당한 자들의 삶' 이 두 가지의 시선이 담겨있는 책이다.
3. 1장 '노련한 장애인' 편에서는 장애인들이 어쩔 수 없이 성취하게 되는 노련함 이야기가 나온다. 장애인들의 노련함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처음에는 휠체어를 정확히 1.8초에 한 번씩 밀 수 있는 기술이고, 나중에는 "아이고, 가엾어라. 그래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니?"라는 질문에 "장애인 할인을 받기 위해서죠!"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유쾌함이라 했다. 작가는 이 것을 유쾌함 또는 상호작용의 기술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파도에 깎이고 또 깎인 바닷가 몽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하지만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4. 품격와 존엄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핏 보면 비슷해보이는 말이지만 뜻은 전혀 다른 말이다.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존엄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5. 잘못된 삶 소송 - 의사의 판단이 틀려 부모가 출산한 장애아 스스로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소송이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이다. 소송명 자체로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마디로 '내 삶이 잘못된 삶이니 나를 태어나게 한 의사 니가 책임을 져라, 보상을 해라' 라는 것인데 대법원 결과는 기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가 소송을 걸었던 마음(물론 부모가 법정대리인으로 대신 청구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장애아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예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 '예의 바른 무관심' -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이들은 모두 서로의 연기가 품고 있는 의도를 공유한다. p66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 찬란한 슬픔의 봄,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만큼 좋다.
7. CODA 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농인의 자녀라는 영어의 약자라고 한다. '저희 부모님은 농인입니다'는 어떤 결핍을 드러내는 반면, '저는 코다입니다'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정말 맞는 말이다. 어떤 것의 결핍은 결코 정체성이 될 수 없다.
8. 읽으면서 정말 배운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았다. 특히 나를 비롯한 비장애인들이 언제까지고, 절대로, 영원히, 변함없이 비장애인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마치 나는 절대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무관심하고 무심했다.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생각하다 최근에 내가 장애인을 만난 적이 있나 돌이켜 봤는데 작년까지 근무하던 학교 학생 1명이 다였다. 내 주변에도 장애인이 분명 있을 텐데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나. 답은 하나다. 그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으니까. 책에서 나온 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는 정말이지 심각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동권이 사회권이 아니고 평등권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데에 동감한다. 그동안 내가 장애인들을 대하던 태도가 기껏해야 '예의 바른 무관심' 지키기 수준이었다면 앞으로는 그것보다는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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