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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1 <빛의 제국> 김영하

by 헹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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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연료통 밑바닥에 가라앉은 몇 방울의 냉소를 연료 삼아 겨우 굴러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권태가 걸음걸음 바짓자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p87

 

겉으로 봐서는 아무도 그의 가정에 불어닥친 겹겹의 불행을 짐작도 못 할 정도로 늘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 밝고 명람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에서 후반부의 놀라운 반전을 위해 준비해놓은 따뜻하고 환한 서두 같았다. 그러니 어느 날 누군가 다가와 "김이엽씨 어제 자기 집에서 자살했대. 목을 맸다는구만"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p98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었다. p114

 

압구정동의 세련된 주민들은 맨발로 걸어가는 그녀에게 아무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 냉정함이, 호기심을 감출 줄 아는 그 도회적 태도가 그녀에게는 정말 놀라웠다. p190

 

4월은 더했다. 목련은 피었다가 가랑비에도 목을 부러뜨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p210

 

육식은 부자연스럽다. 생각해보라. 길을 가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려 있으면 우리는 아무 죄의식 없이 그것을 따 베어물 수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닭의 다리를 쭉 찢어 뜯어먹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p300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p314

 

"왜 있잖아,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같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 그러다보니 낮의 삶보다 밤의 삶이 더 일관성이 있는 거야. p320

 

그런데 하나의 절차가 다른 하나의 절차를 물고 들어갔다. 작은 결정이 또다른 작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나폴리에서, 지금 와선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지만 어쨌든, p347

 

패배자인 척, 우울한 척하는 얼굴의 이면에 언제나 세상 모든 것을 얕잡아보는 우월주의자의 표정이 있었다구. p384

 

 

 

 

 

1. 10년, 20년 씩 장기공연하는 연극에 오랫동안 출연하게 되면 어떨까? 혹은 내가 사는 이 삶이 연극이라면 어떨까?

 

2. 내 주변에도 기영처럼 잊혀진 간첩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종로를 본 따 만든 지하 세트장에서 남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훈련 받은 후 이 곳으로 내려온, 그러나 처음 작전을 제외하고는 10년 동안 아무 명령이 없어 그저 기다리기만한 간첩. 사실 그저 기다리기만한 것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낳은 딸이 중학생이 되었으니까. 처음에야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지만 어느 임계치를 지나고서부터는 이 곳에서 이룬 삶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3. 김영하 작가 소설은 <오직 두 사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어서 이 책을 세 번째로 읽는다. 전반적으로 침착하고 우울하고 어떤 장면들은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 책에서 기영이 코엑스나 호텔에서 쫓기는 장면은 머릿속에서 장면이 그려질 정도였다. 근데 사실 이 장면은 왜 나온 걸까 싶은 부분도 많았다. 회수 되지 않은 떡밥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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