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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2021-18

by 헹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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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정치인을 떠올린 다음 스스로 물어보았으면 합니다. "그 사람이 내가 개발하는 기술로 무엇을 할까?"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 제목인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 읽고 난 다음 드는 생각은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하는 것인가, 진화하는 것인가?

- 인상 깊은 구절 하나가 생각난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한 말이다. 나는 영생과 불멸을 꿈꾸지 않는데. 왜 꿈꾸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동안 인간의 수명은 제한되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것 같다. 물론 이건 관성의 법칙 같은 거라 세상이 달라지면 내 생각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영생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항상 젊은 신체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한 100년 정도는 즐거울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왠지 지겨워질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고 하는가. 뇌는 새로운 상황에서만 용량을 할애하고 출근길과 퇴근길, 그리고 매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스킵한다. 100년 정도 지나면 내게 모든 건들이 익숙해져서 그냥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갈 뿐이지 않을까? 칼 세이건이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생에는 '서사적 궤적'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불행했으나 나중에 행복해진 삶의 궤적과 처음에는 행복했으나 나중에는 불행해진 삶의 궤적이 다르다고. 만약 불멸한다면 그 궤적은 끝이 없어지는 것인데 끝없는 궤적은 정말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은 헤라클레스의 힘, 아프로디테의 관능, 아테나의 지혜는 물론, 원한다면 디오니소스의 광기까지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생명 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이다.

- 헤라클레스의 힘과 아테나의 지혜를 보고도 사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알고리즘은 자연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품질관리를 받는다. 따라서 확률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동물들만 자손을 남긴다.

그보다는 긴팔원숭이의 몸이 곧 계산기이다. 감각과 감정이라는 것은 실은 알고리즘이다. 긴팔원숭이는 배고픔을 느끼고, 사자를 보면 두려움을 느껴 벌벌 떨고, 바나나를 보면 입에 침이 고인다. 긴팔원숭이는 순간적으로 이런 감각, 감정, 욕망의 폭풍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단지 계산과정일 뿐이다. 계산의 결과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 예전에 심리학 수업을 들으며 같은 상황이라도 인지 과정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배웠다. 예를 들어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을 둔 아들 2명이 있다면 한 명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고, 한 명은 아버지와 똑같은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개인이 느끼는 감각, 감정, 생각, 판단 이런 것들이 모두 알고리즘에 의해 생기고 사라진다고 하니 왠지 허무하고 씁쓸하다. 아들 둘의 삶은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닌 그저 주어진 것을 실현했을 뿐이라는 게. 내가 이토록 자유 의지를 믿고 싶어하는 것도 다 알고리즘 때문인 건가.

-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어떤 실체가 실재하는지 알려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선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고통을 느낄까봐 걱정을 하고, 실재하는 것들의 고통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를 열어 그 안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실재들과 똑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뿐이었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을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쥐의 뇌에 전극을 달아 스위치를 누르면 왼쪽으로 움직이거나 사다리를 오르게 만들었다. 쥐의 욕망(왼쪽으로 움직이고 싶게 만들거나, 사다리를 오르고 싶게 만드는)을 조정한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의 실험은 특별하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가 덧붙인 한 문장이 소름 돋는다. "물론 나에겐 자유의지가 있어! 잘 봐, 나는 왼쪽으로 돌고 싶으면 왼쪽으로 돌아. 사다리를 오르고 싶으면 오르고, 이게 바로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증거 아니야?" 내가 혹시 실험용 사피엔스는 아닐까?

-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나'라고 생각하며 몇번씩 이야기를 고쳐쓰며 통일된 나, 고유한 나, 일관된 나라는 생각을 갖고 싶어 한다. 맞는 말이다.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나는 네가 태어난 날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네 이메일을 모두 읽었고, 네 통화를 모두 기록했고, 네가 좋아하는 영화들, 네 유전자 정보, 네 심장 기록도모두 갖고 있어. 네가 데이트한 정확한 날짜도 보관하고 있으니, 존이나 폴과 만날 때마다 네 심장박동, 혈압, 혈당수치를 초 단위로 기록한 그래프를 원한다면 보여줄 수 있어. 필요하다면 네가 그들과 가진 모든 성관계의 정확한 순위도 제공할 수 있어. 그리고 당연히 나는 너를 아는 것만큼 그들도 잘 알아. 이 모든 정보, 내 뛰어난 알고리즘, 수많은 관계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통계자료를 토대로, 나는 너에게 존을 선택하라고 권해. 장기적으로 그와 함께할 때 더 만족스러울 확률이 87퍼센트야."

- 너무 현실 같아서 너무 무서운 이야기. 우리는 연애 또는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가. 친구에게 내 남친 혹은 남편 후보자의 세세한 정보들까지 읊어가며 이 사람 어떤 것 같냐 물어본다. 하지만 친구는 완전한 내가 아니라 한계가 있다. 하지만 구글이라면, 내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를 알고 있는, 구글이 존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하라 것이다. 시스템은 다운그레이드된 사람들을 선호할 텐데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게 될 초인간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성가신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모든 농부들이 알고 있듯이, 염소 무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대개 가장 똑똑한 염소이다. 농업혁명 과정에서 동물의 마음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기술 인본주의자들이 꿈꾸는 두 번째 인지혁명은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이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인간은의 경험은 그 자체로는 늑대나 코끼르의 경험보다 나을 것이 없다. 데이터 조각의 가치는 어느 것이나 같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시를 써 온라인에 게재할 수 있고, 그렇게함으로써 전 지구적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풍성하게 한다. 이것이 인간의 데이터 조각들을 중요하게 만든다.

자동차가 마차를 대체했을 때, 우리는 말을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퇴역시켰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도 똑같은 일을 당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데이터교가 인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똑같이 돌려줄 차례이다. "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

간단히 말하자면 전작인 <사피엔스>가 과거고 <호모데우스>가 미래라고 볼 수 있겠다. 전작에서는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인간 종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형제 살해범이었다면, <호모데우스>에서는 이제 사피엔스는 자동차가 생기고 전혀 사용되지 않는 마차나 다름없지 않겠냐고 묻는다. 불멸과 영생에 대한 욕망은 이미 기차 설로에 올랐으므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로를 변경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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