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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8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by 헹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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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한창 걷기에 꽂혀있을 때가 있었다. 친한 선생님들과 만보 걷기 클럽을 만들어서 매일 걸음수를 인증하고, 만보를 못 채운 날은 벌금을 냈다. 벌금은 모아서 회식할 때 쓰기로 했는데 다들 열성적으로 만보를 채우는 바람에 크게 모으진 못했다. 만보를 채워야해서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괜히 불러내서 산책하고 했던 날들이 참 즐거웠다. 어떤 날은 4만보를 를 찍어서 가민에서 알람이 울리는데 그날은 정말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다 학기를 마무리하며 만보클럽도 끝이 났다. 걸어야할 이유가 하나 사라진 것뿐인데 걷기에 대한 열정이 확 식어버렸다. 다시 걸어야지 생각은 하는데 몸이 마음같지 않다. 그러던 중에 걷기와 관련된 책이라도 읽으면 다시 걷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고른 책이다.

 

한 보 한 보가 너무나 힘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귀찮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p78

 

너무 너무 공감했던 구절이다. 2019년 여름에 혼자서 국토대장정을 하겠다고 서울로 갔다. 내 계획은 서울에서 울산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었는데, 정확히 3일 차되던 날 여주보를 지나면서 이 생각을 똑같이 했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뭘 위해서 이걸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더 힘에 부쳤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귀찮음'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결국 그 날 자전거를 샀고 나머지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국토대장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있다. 그런데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한여름 뙤약볕에 국도대장정이라니, 너무 무식해서 용감했다. 걷기 좋은 날을 골랐어야했다. 걷기 좋은 길, 걷기 좋은 날씨. 그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끝까지 몰아붙인 다음 그래도 나는 죽지 않는다. 괜찮다. 뭐 이런 한계의 극복과 성취감 같은 걸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라면 내가 조금 덜 힘들고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 같다.

 

그의 주변에서는 연예인 하정우가 생각보다 바른 사나이라서 놀라는 것 같다. 나를 비롯해 보통의 사람들은 연예인들이나 예술가는 고독하거나, 처절하거나,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자기파괴적일 거라(그런 면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정우는 직장인들과 다를 것 없이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걷는다. '나는 오랫동안 연기하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나 또한 소위 말하는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삶을 전혀 동경하지 않기 때문에 하정우의 이런 생각들이 너무 좋았다. 나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아야지. p20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p206

 

뼈 맞았다.

 

사람들은 대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집중력이 떨어진다고들 말한다. (...) 나는 일면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딴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여기저기에 다양한 관심을 두는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도통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타인의 시선에서는정신없고 불안해 보일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호기심 안테나를 활짝 펼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p216

 

이건 나를 위한 변론이다.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너무 많다. 운동? 수영을 제일 좋아했다가, 배드민턴이 더 좋아졌다가, 클라이밍 좋아져서 덤볐다가 다시 접고, 그러다 탁구도 한 번 배워보고, 요즘은 테니스 배우고, 최근 요가도 좋아졌다. 근데 이 와중에 축구랑 배구도 배우고 싶고 그렇다. 다른 거? 피아노, 요리, 뜨개질, 베이킹, 사진, 동영상, 글쓰기 다 말하려면 끝도 없을 만큼 많이 배워보고 싶다. 예전에는 책 1권 다 읽을 때까지 그것만 붙잡고 있었는데 요즘은 학교에서 읽는 책 2권, 집에서는 거실에 1권, 소파에 1권, 침대 머리 맡에 1권 그렇다. 근데 오히려 요즘 책을 더 많이 읽는 것 같다. 내 기분에 상황에 따라서 책을 골라 읽는데, 딱 꽂힐 느낌(뭔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면 책장이 순식간에 넘어간다. 그래서 나도 '한 우물 못 파는 사람'이기보다는 '여기저기에 다양한 관심을 두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뭔가 하나만 해야 한다, 한 우물만 파야된다는 고정관념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p286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p286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p291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p291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만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p291

 

예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서 아무거나 될 수 있다.'는 글귀를 보고 되게 감동을 받았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이 되기도 한다. 

 

분명 '걷기'에 관련된 책인데 인상 깊은 구절은 딱히 걷기랑 관련이 없는, 하정우의 생각들이다. 그런데 분명히 느껴진다. 이건 그가 걸으면서 했던 생각일 것이다.(아니면... 어쩔 수 없고!) 혼자 걸을 때면 한참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근데 신기하게 걸으면서 하는 생각은 어찌됐든 긍정적으로 나아간다. 집에 누워서 생각을 하면 끝도 없이 우울해지는 것과 반대다. 근데 나는 왜 걷기가 좋은 걸 알면서 항상 집에서 골머리를 앓는 쪽을 택할까? 

 

걷자 걷자 자주 걷자! 만보 클럽이 부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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