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양정무
1권은 크게 원시미술, 이집트 미술, 메소포타미아 미술로 나뉜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모든 작품은 기원전 작품이다. 빗살무늬토기나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건 워낙 유명하다보니 분명 익숙했는데, 유난히 이 책을 읽으면서 작품 사진 밑에 쓰여있는 '기원 전 ****년'이 신경이 쓰였고 그러다보니 생소하게 느껴졌다. '기원 전에 이걸 만들었다니? 적어도 2021년 전에 이걸 만들었다니?'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놀랍고 대단한 작품이라는 게 느껴진다.
*읽다가 정리한 내용들, 머리에 넣고 읽으면 시대 감각이 더 빨리 올 듯
400만 년 전, 아프리카에 등장한 유인원과 인간의 중간 종족, 오스트랄로피테쿠스
170만 년 전, 주먹도끼 사용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출현
기원전 4만 년, 지적혁명 (언어 사용, 미술 활동 시작)
기원전 3만 년, 쇼베 동굴벽화(구석기 벽화가 그려진 동굴 중 가장 오래된 동굴)
기원전 2만 8천년 전, 발렌도르프의 비너스(구석기 비너스)
기원전 1만 년 전, 빙하기 종말
기원전 3천 년, 문자 사용(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했던 쐐기문자를 인류 최초의 문자로 봄)
특히 이집트 미술을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다. 그동안 이집트인들이 영생을 믿고 미라를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영생불사를 원했던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가는 나일강 주변으로 펼쳐진 푸른 농지가 메마른 모래언덕과 길 하나를 두고 나뉜는 점, 두 공간의 뚜렷한 대비-생명과 죽음, 풍요와 불모의 땅-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사진 속에서 푸른 땅과 사막의 땅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히 대비되는 것을 보니 수긍이 되었다.
이집트에게 나일강이란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동안, 왼쪽을 서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해가 뜨는 방향인 동안은 생명의 땅이라고 여겼으며, 해가 지는 방향인 서안은 저승 세계의 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기자 대피라미드를 포함한 주요 무덤들은 모두 서안에 있는 반면, 사람들이 모여살던 도시는 동안에 있다. 또한 보통은 지도의 위쪽부터 상, 중, 하로 구분하는데 반해 나일강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발원하여 지중해 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거꾸로 아래쪽부터 상, 중, 하 이집트라고 구분한다. 이렇듯 나일강을 중심으로 생명과 죽음의 땅을 나누고, 나일강이 흐르는 곳이 가장 위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집트인들에게 나일강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을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이집트는 3000년 동안 비슷한 그림만 그렸다.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얼굴은 옆면, 눈과 상체는 정면, 다리는 다시 측면으로 그린다. 이집트 그림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그 그림체다. 왜 그랬을까? 이집트인들은 본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벽하기 때문에 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벽한 삶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의 본질을 가장 드러내는 모습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조각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애초에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을 그릴 때는 정면성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그렸다. 그러니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된 그림의 주인공들은 이집트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기억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그들은 사람이 살고 죽는 게 기억되느냐 기억되지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름이 계속 불리면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게 이집트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보기 좋은 미술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 인체 조각을 제작했습니다. 조각가를 고용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조각상을 만들면 영원히 살게 된다고 생각했죠. 이쯤 되면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는 조각가를 '영원히 살게 해주는 자'라고 불렀다는 게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p230
기자의 대 피라미드에는 3개의 무덤이있다. 가장 큰 것부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왕의 무덤이다. 가장 큰 쿠푸 왕의 무덤은 높이가 146m에 달해서 무려 40층 건물과 비슷한 높이라고 한다. 그런데 같은 높이의 정육면체 빌딩보다 삼각형의 피라미드가 경사면을 이루며 점점 높아지는 모습에 위압감이 엄청나다고 한다. 그래서 꼭 한 번 가서 보고싶다. 쿠푸(할아버지), 카프레(아버지), 멘카우레(아들)이다.
스핑크스는 왜 스핑크스라 불리우게 되었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 거대한 무덤을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고 '메르'라 부른다. 운하, 사랑, 괭이와 같은 뜻이다. 반면 우리가 부르는 피라미드는 단순히 삼격형을 의미하는 그리스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왜 피라미드라고 부를까? 우리가 고대 이집트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언어 덕분인데, 하나는 고대 이집트어이고 하나는 그리스어이다. 그런데 1822년 상폴리옹이 신성문자를 해독하기 전까지는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이 남긴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문제는 그리스인이 남긴 이집트에 대한 기록이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이집트 문명이 너무 대단했기에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폄하하고, 왜곡시켰다. 그래서 지평선의 호루스에게 스핑크스라는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이름이 붙어버린 것이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기원전 1330년경, 이집트박물관
투탕카멘 미라의 얼굴에 덮혀있던 마스크라고 한다. 오늘 만든 작품이라고 해도 될만큼 깔끔하고 정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다.
람세스 2세의 미라, 이집트박물관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며 거의 80년이 달하는 세월동안 권좌에 앉은 왕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문화유산도 많이 남기고 아름다운 건축물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미라를 보고 있자니 이렇게 남아있는 게 더 곤욕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죽었으니까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하겠지만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치욕이나 곤욕일 것 같다. 한 때는 이집트를 호령했던 왕이 지금은 박물관 미라 신세라니.. 게다가 더 충격이었던 것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이 미라를 이집트 밖으로 반출하려고 했을 때, 관세 대상 품목 중에 미라가 없어서 건어물 관세를 매겼다는 것이었다. 씁쓸하다.
이집트 신전의 표준 구조 중 하나인 오벨리스크가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세워져있다고 한다. 성 베드로 광장 사진에 항상 높게 세워져있는 그 기둥, 그 기둥이 기원후 40년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약탈해온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저 큰 돌덩어리를 유럽까지 들고 갔을까? 성 베드로 광장에 가면 더 오벨리스크를 꼭 더 유심히 봐야지..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고 경주 대릉원 사진을 보니 그 전과 너무 다르게 보였다. 원래도 경주를 좋아해서 종종 가는 편인데, 이번에 사진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가 전해 느끼지 못했을 느낌과 시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표현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현재 이라크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인류 최초의 문명이 꽃핀 곳이다. 특이한 것은 이집트 문명이 나라 이름에서 따온 것에 반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아무도 이란-이라크 문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적 분쟁이 심각한 지역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색깔이 다르다. 이집트는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시 여기며, 조각상을 만드는 이유만 하더라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영원한 집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는 현세의 삶에 초점을 두고 농사의 풍년이나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신에게 기도했다. 이렇듯 다른 성향을 띄게 된 데에는 지역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집트의 나일강에 비해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은 홍수와 가뭄이 잦고 지역마다 강수량 편차가 컸기 때문이다. 급격히 변화하는 자연환경 속에서는 영생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함무라비 법비, 기원전 1750년경, 루브르박물관
함무라비 법전은 최초의 법전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최초는 아니라고 한다. 보통 함무라비 법이라 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떠올리지만 신분에 따라서 다른 처벌을 받았다. 노예가 주인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지만 주인이 노예를 죽이면 벌금으로 처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신명 재판이라고 해서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 재판을 신의 뜻에 맡겨서 해결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강물에 빠뜨려서 죽으면 유죄, 살아나오면 무죄라고 믿었다고 한다.
한국의 라스코 동굴벽화라고 부를 만한 대작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다시 보러 가야겠다. (신석기에서 청동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
미알못에,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 사진과 그림이 많고, 대화체로 쓰여서 읽기 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언젠가는 직접 보러갈 거야'라는 생각이 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더 자세히 읽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구글 맵 목록에는 '이집트'가 생겼다. 구글 맵으로 이집트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 찾아보고, 나일강이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보고, '와 진짜 기자가 나일강 왼쪽에 있구나. 신기하다.' 이런 생각도 하면서.. 정말 이집트 여행을 갈 사람이라면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1>을 꼭! 꼭! 읽어보고 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난처한미술이야기 #난생처음한번공부하는미술이야기 #양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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