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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p7
토크니즘이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p24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는 않는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 탑승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p28
흐르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물결을 가로지르거나 거슬러 올러가는 물고기보다 편하다. 하지만 물결을 따라가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그저 편하다고만 할 수 없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p33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p35
세상이 기울어져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평등을 찾다보면 불평등한 해법이 나오기 쉽다. (...)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돈을 더 많이 내야하는 것 아닐까요?" p36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국적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보는지 주관적인 관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건 그중 어떤 경계선을 따라 우리는 내부인에게 친절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외부인에게는 매정하고 때로 잔인한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p53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 어떤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역량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p66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인식하기 어렵다.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p78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오늘날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p84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며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p98
식용유 세트, 여사님, 그리고 사원증 목줄. 모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왜 이렇게 구분을 하려는 걸까? 이 중에서 식용유 세트와 햄 세트의 경우라면 재정적 한계 때문에 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사님'과 '주무관'이란 호칭 사이나, 사원증 목줄 색깔 사이에는 아무런 비용 차이도 없다. 재정적인 이유가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애써 구분을 한다. 구분이 목적인 구분이다. p102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능력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불평등이 당연하게 보인다. p104
"무지의 장막" 내가 가난한지 부자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능력이나 재능이 어느 수준인지 등 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가정하고 사회질서를 정할 때, 개인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모두에게 정의로운 규칙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채용기준에서 토익 점수의 경우, 자신이 청각장애인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라면 신은 어떤 규칙을 채택하겠는가? p108
사람들은 "꼭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축제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 '보통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거리는 '퀴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퀴어의 자리는 어디인가? p136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p139
정말 누구든 어디서든, 싫은 감정을 존중해야 할까? 사실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서는 자리와 나의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p142
왕따나 괴롭힘,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에서 우리는 종종 피해자를 먼저 의심한다.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별의 부당함을 보기보다 차별의 부당함을 외치는 소수자의 흠을 찾고 비난한다. 그렇게 차별은 계속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p169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로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p188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p189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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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임팩트가 컸던 책..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문인 것 같다.
프롤로그에서는 혐오표현 토론회에 참석해서 무의식적으로, 의도치 않게 결정장애라는 혐오표현을 썼던 작가의 경험담이 나온다. 학부 시절 내 경험과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대학교 3학년 때였나, 당시 커먼리딩세미나라는 수업을 수강했는데 그 수업은 정해진 책 한 권을 읽고 다 같이 토론하는 방식이었고 그 때 주제 책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였다. 제목처럼 여성 혐오에 관한 사례를 다루고 고찰하는 내용이었는데 사실 책을 안 읽고 수업에 갔었다. 원래 발표나 토론에 잘 참여하지 않는 극내향 쭈구리라 그날도 그냥 지나가겠지 싶었는데 어찌 교수님 레이더에 걸려서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 때 했던 말들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말하고 나서 그 강의실을 채우는 싸함이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옳지 않다는 지적을 받으니(사실 아무도 지적하진 않았다. 강의실을 가득 채우는 싸한 분위기로 알았다..) 처음엔 ‘내가 차별을 한다고?’ 하며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엔 방어기제가 켜지면서 ‘이게 뭐? 뭐가 문젠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내가 얼마나 차별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너무 후회되고 쪽팔린 기억이다.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해도 창피할 만큼. 그래도 그 때 그 쪽팔림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을 것 같아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암튼 책에서 차별하는 사람은 차별이 보이지 않고 차별 당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했지만, 차별 당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오히려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에필로그에서는 영화 <우리들>에 나온 팀 가르기 장면을 인용하면서 집단에 소속되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던 어린시절의 공포감이 나온다. 초등학생 시절 그래도 나는 이름이 빨리 호명되는 편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근데 영화 속 주인공이 이름을 호명받지 못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불안하고 긴장되고 짜증이 났다. 단지 내가 다수에 속해있음으로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내가 다수에 속해있을 거란 생각, 내가 언제까지나 장애없이 건강한 이성애자일 거란 생각이 차별을 보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무지의 장막이 필요하다.
#선량한차별주의자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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