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갔고, 거기서 웬 남자를 만나 누가 내 집에 와서 죽는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단계별로 들어 두었다. 오늘 아침에는 진짜로 모르는 사람이 내 집에 와서 죽었다. 23%
뜨거운 물에 몸이 노글노글해졌다. 행복했다. 팔팔 끓는 국물 속에 퐁 빠진 말린 버섯의 심정이 바로 이렇겠지. 왕년의 부피를 되찾는다는 건 아주 유쾌한 일이다. 나는 늘 저온 건조 시킨 채소들을 불쌍히 여겨왔다. 몸의 수분을 죄다 잃었는데,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7%
그 순간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가서 어젯밤에 마시던 클로 부조를 한 잔 따랐다. 37%
샴페인을 마시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열다섯 번째 모금과 열여섯 번째 모금 사이, 모든 인간이 귀족이 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인해 인간은 이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취기의 절정에 도달하려고 마시고 또 마시다가 고결하기 그지없는 이 순간을 그만 술에 빠뜨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57%
"모르겠어요. 전 늘 두려워요. 그게 제 인생의 일부인 것 같아요." 62%
"저는 죽는 날 가벼운 몸으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요." 만일 내가 지그리드를 아직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말 때문에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으리라. 79%
지그리드와 나는 지구상에서 제일가는 강대국들의 경제논리를 개인 차원에서 재현해 보이고 있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진 빚은 우리 알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왕자의 특권, 면책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집의 거실에서 죽는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시한 삶을 살고 있는 밥티스트 보르다브다. 어느날 술자리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누군가(모르는 사람)가 당신 집 거실에서 죽는다면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가라는 조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왜 우리 집 거실에 와서 죽으며, 도대체 이 사람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생각한다. 즐거운 저녁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동차가 고장 나 전화기를 좀 빌릴 수 있겠냐던 남자가 정말로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여기서 의문은 자동차가 고장나지 않았었고, 근처에 공중 전화 부스가 있었다는 점.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밥티스트 보르다브는 어젯밤 그 남자의 조언처럼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가지도 않았다. 다만 부유하고 신비로워보이는 자신의 집 거실에 쓰러져 죽은 그 남자의 신원을 훔치기로 했다. 죽은 올라프를 보며 '옛 올라프' 혹은 '나의 전임자'라고 칭하는 장면은 정말 기괴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허무맹랑한 신원 도둑질은 성공했다. 마지막 장에 다다라 보르다브는 올라프의 차, 꿈의 저택, 아름다운 아내, 돈 그리고 왕자의 특권까지 손에 쥐었다.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다 읽고 나니 주인공이 한편으론 또라이 같고 한편으론 불쌍했다. 아무리 하찮은 삶이었어도 자신의 삶을 바로 내다버리고 지워버릴 만큼인가? 올라프를 죽이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모든 것을 훔쳤으니 보르다브는 흉악한 범죄자다. 근데 뭐 한편으론 훔친 행복이면 어떠냐..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기아 난민으로 태어나는 이 공평함이라고는 1도 없는 세상에 행복 좀 훔치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겠지. 모두가 남의 행복을 훔치기만 하면 오히려 모두가 더 불행해질테니..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읽는 동안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생각났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암튼 너무 시끄러운 한탸의 고독에 비할 만큼 보르다브도 시끄러웠다. 어쩌면 겉으로 말이 없는 사람들은 속으로 누구보다 더 수다스러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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