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수다쟁이를 상대하는 것도 물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쳐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호의에서 매일 그에게 갖다 준 커피 한 잔이 이제 그에 대한 의무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움과 함께 나는 첫 방문 이후 우리가 그에게 제공한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의무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단순한 머리는 단 한 번의 친절을 법적인 보호를 받는 권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소>라는 말도, 어색한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도 없었다. 완벽한 무관심이 있을 뿐. 여러 시간 동안 우리 집에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의 그런 태도는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 나는 예의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멋진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좋은가. 자신에게는 온갖 결례를 허용하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히려 결례를 저지른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하다니!
하지만 누군가 내 집 문을 두드릴 때, 열어 주지 않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해. 그건 뿌리 깊은 거야. 선천적인 것만 바꿀 수 없는 게 아니야. 후천적인 특성 역시 어쩔 수 없는 게 있어. 근본적인 공민 의식이지. 예를 들자면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사를 안한다든지, 더 이상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는 게 나로서는 불가능한 것과도 같아.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육중하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숨 막히게 하고, 최대한 예의 없고, 최대한 공허해야 했다.
선은 순금처럼 자연 상태에서 순순한 형태로는 눈에 띄지 않는다. (...) 하지만 악은 가스와도 같다. 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냄새로 식별할 수 있다. 악은 걸핏하면 정체되어 숨 막히는 층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처음에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악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악이 해놓은 일을 발견한다. 악이 차지한 지위와 이룩한 과업을 보고서야 자신이 졌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 아닌가. 가스를 몰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 베르나르댕 씨는 악이 아니라, 불길한 가스가 깃들어 있는 거대한 공허였다.
<그럼 그럼> 쥘리에트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단어의 언어적 특성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며여했다. 수학에서는 플러스에 플러스를 더하면 플러스가 되지만, 그렇다는 말이 두 개 겹치면 언제나 부정을 뜻하는 법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 대한 한 가지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안에는 또 다른 에밀 아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편지를 쓴 것이 잘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최소한의 수치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렇게 행동한 나 자신이 기꺼웠다.
그때 기묘한 의문이 떠올랐다. 두 에밀 아젤 중에서 누가 옳은가?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하는, 약간 비겁하다고 할 수 있는 낮의 에밀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대담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는 반항적이고 구역질나는 밤의 에밀인가?
6월에 불행하다는 것은 슈베르트를 들으며 행복해하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6월은 견디기 어려운 달이었다. 30일 동안 조금만 언짢아해도 스스로의 무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강요된 행복은 악몽과 다른 바 없었다.
<인생은 긴 한탄, 끊나지 않는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재지 못했다.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옮긴이의 말
일체로 여겨졌던 에밀과 쥘리에트가 자기와 타자로 분리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필연적인 존재의 벽이 부각되고, 다시 주인공 에밀이 길들여진 자아와 본능적인 자아가 자기와 타자로 분리되면서,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는 별개라는 화자의 첫 고백을 의미 심장한 것으로 만든다. 한편 당연히 타자여야 하는 베르나르댕 부인은 쥘리에트와 같은 편에 편입된다.
1. 온화하고 교양있는,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노부부 에밀과 쥘리에트가 있다.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고싶었던 이 노부부는 평생을 교사로 일했던 남편 에밀의 은퇴 이후 고요하고 평화로운 집을 찾아 이사했다.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 속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빨리 퇴직하고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 생각하며.. 그러던 중 이웃집 남자가 찾아왔다. 아니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확히 오후 네시에 와서 여섯시에 다시 돌아간다.
2. 이웃집 남자는 초대한 적도 없는데 돌연 집으로 찾아와 한사코 입을 다물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제일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노부부가 (집에 없는 척 혹은 안 들리는 척을 하자며) 문을 열어주지 않자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결국 문을 열어준 에밀을 노려보며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없어서 안 나간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에밀이 표현한 것처럼 이웃집 남자는 불길한 가스가 깃든 거대한 공허다. 이웃집 남자의 방문 이후 에밀과 쥘리에트는 더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경은 오직 오후 네시에, 이웃집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3. 어떻게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이웃집 방문'을 이렇게 소름끼치게끔 만든 스토리텔링도 좋았지만, 이웃집 남자가 찾아올 때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자신을 발견하는 (그리고 고뇌하는) 에밀의 내면 세계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나 평생을 예의있게 살아온, 다른 사람을 보고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후천적 교양이 프로그래밍 된, 에밀이 "예의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멋진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부분은 최고였다.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 인사한다'는 공식이 프로그래밍된 사람인데 살다보면 절대 먼저 인사를 안 하거나 심지어 내 인사를 무시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치하지만 특정 인물에게 인사를 몇 번 씹힌 이후로 '나도 절대 그 사람에게 인사를 안 하겠어'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에밀과 같은 후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몇 번이나 더 먼저 인사하고 씹혀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도 고개를 빳빳히 들고 인사를 안 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에밀과 같은 생각을 했다. 예의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멋진 일임에 틀림없다. 예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다. 나는 아직도 그 날 나의 예의없음이 짜릿하다.
4. 에밀이 '이웃집 남자의 죽음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에밀이 또라이가 됐다고 생각했다. 층간소음에 살인난다는 말처럼 에밀이 이웃집 남자의 방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드디어 이성을 잃었구나... 그런데 에밀이 새벽에 그(베르나르댕)를 찾아갔을 때 아무런 말도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부분을 읽고 진짜 밤의 에밀이 그를 도운 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연명치료 중단의 개념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봐도 꺼림칙하다. 비록 베르나르댕의 자살을 막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야 있지만 타인이 간절히 바라는 죽음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낮의 에밀을 비겁한 겁쟁이로 취급할 필요까지는 없다.
5. 옮긴이의 말 부분에 나오는 '필연적인 존재의 벽'이라는 말에 너무 깊은 공감이 됐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들 우리는 결국 각자 존재할 뿐이다.
6. 아무래도 아멜리 노통브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라 좋다. 하지만 다음 책은 아껴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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