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 김혜진
신기했고 재미있었는데 뭐랄까, 불쾌해졌다. 별풍선 하나는 100원, 열 개는 1000원, 열 명이 열 개씩이면 만 원, 100명이 100개씩이면 100만 원이 되는 거였다. 그걸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게도 내고 사업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러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p29
<가만한 나날> 김세희
이렇게 해도 괜찮나? 싶을 때도 있었다. 병원이 제시한 문구를 넣어 사각턱을 절제했다고 후기를 작성할 때였다. 치아 교정 후기, 라식 수술 체험 후기를 쓸 때도 그랬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곧 그 감각도 사라졌다.
게다가 내가 지금껏 뭔가를 사고 찾을 때마다 검색해 참고했던 블로그 후기들도 죄다 업체를 통해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1
전혀 기억에 없지만, 내가 쓴 글이 맞았다. 침구며 패브릭 소파, 아기용품에 날마다 뿌리고 있다고, 간편한데다 마음까지 뽀송뽀송해지는 기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특히 아기 있는 집이라면 무조건 추천이예요~~^^ p59
그러나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뽀송이를 정성껏 리뷰했을 것이다. 불법 대부업 광고도 아니고, 그냥 가정용 살균제였다. 대기업에서 만들었고, 전국의 마트에서 팔린 제품. 거기에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 들어 있다는 걸 알 방법이 없었다. 그건 해롭지 않은, 해로울 리가 없는 제품이었다. 그래야 마땅했다. p63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불행해질 수 있다면, 과연 그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p72
<기도> 김애란
언니의 얼굴은 어른을 대하는 예의와 낭패감, 미소, 수치심이 섞여 형태를 갖추지 못한 반죽처럼 흔들렸다. 명절 때도 친구 결혼식 때도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다. p82
거처를 자주 옮기는 동안 짐을 최소화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겠지만, 언니가 가진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점점 작아져 간 탓이리라. p92
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게 어떤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몇십 년간 반복되었다는 것이. p94
<저건 사람도 아니다> 서유미
아이는 정말 '그것'이 엄마라고 믿는 걸까. 엄마와 '그것'이 다르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왜? 왜 모르는거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나와 완전히 같은 걸까.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p130
여자가 허둥대며 내 옆을 지나갈 때 그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반쯤 지워진 얼굴로 걸어가는 여자는 바로, 홍과 똑같은 홍이었다. p132
<어디까지를 묻다> 구병모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게 되는 걸까요? p162
<코끼리> 김재영
이 마을에선 불행이 너무나 흔해 발에 차일 지경이다. p170
'파괴의 신 시바님, 이 정도면 충분해요. 더는 재물을 바라지 마세요. 특히 아버지하고 제 손가락만큼은 절대.' p179
<알바생 자르기>
땀 흘리는 소설이라는 제목에 끌려 골랐는데 예상외로 제목과 내용이 일치했다. 보통 땀 흘려 일한다고 이야기하니까.. 아무튼 이 책은 노동에 관한 소설 8편이다. 단편 8개는 노동이라는 한 카테고리에 묶었지만 각각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 달라서 더 재미가 있었다.
<아비>는 BJ, 유투버가 직업이 된 세상과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시선에 대해, <가만한 나날>은 블로그 광고 대행사의 직업 윤리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BJ, 유투버, 블로거 이 전에는 없던 직업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너무나 익숙해져있다. 익숙한데 반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몇 년 전 아이들의 검색 플랫폼이 네이버나 구글이 아닌 유투브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방에 벽지가 갈라져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자마자 유투브에 '셀프 벽지 붙이기'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유투브에는 없는 정보가 없다. 앞으로는 유투브를 통해 배울 수 없는 게 있을까. 유투버들이 양질의 정보 혹은 즐거운 감정을 제공하고 그로 인한 수익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꺼림칙한 발언과 행동이 주요 컨텐츠인 사람들이 유명 인기BJ, 유투버로 손 꼽힐 때는 정말 당황스럽지만. <가만한 나날>에서 시사하는 바처럼 미디어 콘텐츠 제작자들이 갖는 책임, 직업 윤리성이 좀 더 강조되어야할 것 같다.
그 외에 <기도>는 신림동 고시생의 삶을,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워킹맘의 삶을, <어디까지를 묻다>는 감정노동자의 삶을, <코끼리>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알바생 자르기>는 알바생의 삶을 보여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일까? 고시생은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워킹맘은 나 대신 일하는 로봇이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나보다 더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고뇌에 빠진다. 어렸을 때 나랑 똑같은 로봇이 나대신 학교가고 학원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진짜 나보다 무엇이든 더 잘 하는 로봇이 있다면 나는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한편 감정노동자는 콜센터 직원으로 하루종일 폭언을 들으며 지내보다보니 '괜찮냐'는 고객의 한 마디에 펑펑 우는 지경에 이르렀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일에 익숙해질 만큼 극악한 노동 환경에 놓여져있다. 마지막으로 알바생 자르기는 꼭 ‘알바생은 더 친절하고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과 ‘알바생은 불쌍해’라는 생각 중 너는 뭐가 맞는 것 같니? 물어보는 것 같다. 아무튼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건 누가 누가 더 어렵고 힘든 삶인가 우열을 가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땀흘리는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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