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적인 가정에는 수만 개가 넘는 물품들이 있다고 한다. 정주민의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려면 그 모든 물품에 일일이 가치를 매겨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당당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일종의 비자를 받고 나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나라는 인간의 과거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p34
내 삶에 들어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는 DVD들, 듣지 않는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p35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이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p36
이런 인생을 흘러가는 삶, 스트리밍 라이프 Streaming Life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p37
줄은 아까보다 더 길어져 있었고 새치기는 더 심해졌다. 마침내 출발시간 오 분 전에야 겨우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짐을 들고 다시 1층으로 올라가 플랫폼까지 달렸다. 헐레벌떡 차장을 찾아 표를 전하고 짐을 실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차는 열한 시 반이 다 되도록 떠나지 않았다. 괜히 허둥댄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기차들은 시간표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싶을 때 가는 것이었다. p58
아는 옆에서 "믿을 수가 없다"며 어서 이탈리아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가자, 아무 나라로 가버리자며 흥분하고 있었다. p62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p124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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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 18일에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5월 2일이 되어서야 다 읽었다. <여행의 이유> 이후에 나온 진짜 여행기라 호기심이 가득했으나 나는 시칠리아는커녕 이탈리아에도 가본 적도 없었기에 버퍼링이 좀 많이 걸렸다. 생소한 지역이 나올 때마다 구글 맵에서 검색 해보고 사진도 둘러보고 나중에 가봐야겠다 싶으면 저장도 해놓고.. 코로나가 끝나야 나도 유럽 여행을 좀 가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2. 아무튼 오랜 기간에 걸쳐 읽다보니 뒷부분에 대한 감흥만 남은 것 같다. 젊은 사람은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취향을 내세우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나 스스로 확신하고, 뚜렷한 철학과 취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이제는 내가 나의 생각과 취향에 너무 갇히지 않길 바라고 있다.
3. 좋았던 문장들을 다시 적다보니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자 다짐했던 2월이 떠오른다. 원래 이것저것 모으기를 좋아하는 데다 특히 책 욕심이 많아서 (세계문학전집 모아서 전시하는 게 로망인 스타일) 집이 쉽게 꽉꽉 차버렸다.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 책을 읽고 집안에 많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안 쓰는 물건들을 찾아내 당근에 내다 팔고, 화분도 몇 개 정리하고, 책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다. 그리고 다시 까먹고 또 몇 개 사들이고... 역시 몸을 샤워하는 것처럼 정신도 매일 샤워를 해줘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로 왔다가 다시 지나가게끔, Streaming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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