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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뒤적거려도 담배는 잡히지 않았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향해 한참 더듬거리다가 포기한다. p10
나는 곧장 그만두겠다고 했다. 무려 13년 동안 해온 일이었다. 운명이었을까. 극한 반대에 부딪힐 거라는 예상과 달리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나에게 전혀 재능이 없음을, 진즉에 가망 없음 딱지가 붙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p27
나에게는 운수 좋은 날의 트라우마가 있다. 학창 시절 읽어야만 했던 소설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한 예언처럼 들렸다. 좋은 일이 반복될 떈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마지막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거라는 경고일 수도 있으니까. p33
모든 건 시로부터 시작되었고, 시를 통해 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답을 준비해두었다. 내 시를 세상이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었지만 어쩐지 그 멍청함이 내게만 눈부신 세상을 열어줄 것 같았다. p67
그럼 식당 설거지라도 하려고 했더니, 그러기엔 너무 젊어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나.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모든 게 늦고 모든 게 일렀다. 포기할 수도 계속할 수도 없었다. 도전할 수밖에 없어서 도전했고, 버틸 수밖에 없어서 버텼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기회가 왔다. p85
제가 제 꿈을 이룬다고 해도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그건 이룬 게 아니라고 반박하겠죠. 한심하게 볼 거예요. 좋게 봐도 가엾게 여기겠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자신의 능력을 배신한 사람처럼 보이겠죠.
꿈을 못 이룬 건 괜찮아요. 꿈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정말 괴로운 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날 이해해 줄거라 믿었던 유일한 사람이 말도 안 된다고 여긴 거예요. 그 순간 그 사람의 표정을 잊지 못할 거예요. p110
일이 년 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가망이 없다는 말에 시작한 일이었다. 이 년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 사 년을 넘어서자, 가망이 없어도 돌아서기가 힘들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가회의 문은 점점 더 좁아졌고, 할 수 있는 일은 줄어 들었다. 점점 더 무서워졌다. 사 년 칠 개월이라는 시간이 사십칠 년을 괴롭게 할까 봐. 지나온 시간이 남은 시간의 목을 조를까 두려웠다. p151
그럴 때가 있다. 인생이 오직 한 순간을 위해 굴러가는 것 같을 때, 모든 상황이 딱딱 맞아 떨어지고, 가야만 하는 길을 드디어 찾았다 싶을 때, 왜 이제야 왔냐며 문을 활짝 여는 것 같을 때. 그 모든 것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련의 시간으로는 지나치게 길었다. 불가능한 꿈은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닌 점점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p165
어찌 되었던 여기까지 왔다. 내 마음이 어떠하건 현실이 어떠하건, 일단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야 한다. 일단은. p170
***
1. 망생이라는 단어가 있는 말인 줄 알았다. 허망한 생각 뭐 이런 뜻 정도? 그게 아니라 '지망생'할 때 망생이었다. 뭔가 되려고 지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평균 수명과 실업률이 높아가는 요즘, 지망생 신분 한 번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간절한 마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 갑자기 나의 재능없음과 맞닥드렸을 때,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을 쏟아버린 것, 혹은 누군가 내 꿈을 꿈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때.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그래서 마음 아프고 안타깝고 짠하다.
2. '모든 게 늦고 모든 게 일렀다.'라는 구절이 참 와닿더라.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뭔가 하려고 했는데 그때도 난 늦은 편이었다. '고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애들도 있어. 그런 애들 수두룩 빽빽이야.' 최근에는 다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늦게 시작했네, 조금만 더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남들로부터 넌 늦었어, 아직은 일러 그런 말들을 듣게 되는 것 같다. 휘둘리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늦긴 뭐가 늦어요. 지금부터 쳐도 재밌기만 하면 30년은 칠 텐데...
3. 오랜만에 읽은 독립서점 책. 광주 러브앤프리에서 샀다. 한참 구경하다가 제목에 끌려서 집어들었던 것 같다. 첫 장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글이 술술 읽힐까 신기하다 싶어서 샀다. 끝까지 술술 잘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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