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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9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추혜인, 심플라이프, (2020) - 오늘부터 나는 big fan of you

by 헹 202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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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지은이 추혜인

출판사 심플라이프

출판일 2020년 9월 25일

 

 

 

 

그녀는 왜 공대생에서 의대생이 되었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 언니들이 만나고 싶어 공대 여성위원회를 들락거리다 1학년 겨울방학 NGO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다. 당시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특별법 제정 직후라 일은 많은데 일을 할 사람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열정을 다 하는 언니들을 보며 존경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귀에 꽂힌 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고 이듬해 정말 진로를 바꿨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솔직히 백이면 백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 속으로 '진짜 내가 그런 의사되고 싶다'라고 생각할 거라고. 곤경에 빠진 사람 보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대단한 건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진짜로 진로를 바꿨다는 점이다. 전과를 했는지 다시 대입을 한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것이든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도 따뜻한데 행동력까지 끝내준다.

 

 

이름도 참 어려운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 그게 뭐지?

 

이름도 참 어려운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여기서 '살림'은 이름이니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뭔지부터 알아야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 평생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들어도 금방 잊어버렸거나). 아무튼 간단하게 말하면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란 의료진과 마을사람들이 돈과 힘을 합쳐 만든 병원이다. 

 

그럼 왜 의료진이랑 마을사람들이 돈과 힘을 합쳐 병원을 만들어야 하는가? 보통 의사들은 개업을 하지않나. 그 전에 최근 겪은 내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몇 달 전부터 어금니 사이에 음식물이 너무 자주 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치실은 필수템이 되버렸을 정도다. 치아보험 면책기간도 지났겠다 치과에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도대체 어느 치과를 가야할까 고민이 너무 많이 되는 거다. '이 치과 믿을만 한 건가? 신경치료 꼭 해야하는 건가? 과잉진료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크라운 가격이 치과마다 다르지?'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치과에 대한 불신감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결국은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양산의 모 치과 예약을 잡아두긴 했는데 마음이 아직도 찝찝하다. 이게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의료계는 의사가 검사, 시술, 수술 등을 많이 할수록 돈이 되는 구조다. 그러니 환자 입장에서는 '이거 필요없는데 하라고 하는 거 아니야?'하며 진료에 대한 불신이 커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의사들은 의료소송을 대비해 더 방어적인 진료를 하게 되어 더 많은 검사와 수술을 하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다.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하지말고 '환자와 의사 모두 행복한 병원을 만들자'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민들이 자금을 대고 운영하므로 의사는 개업하기 위해 무리하게 은행에 빚을 내지 않아도 된다. 경제적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과잉 진료를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할 수 있다. 신뢰받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의사 추혜인에게 더할 나위없는 좋은 선택이었다.

 

 

여성주의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여성주의 없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이 뒤에 딸려오는 말은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건강을 해치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이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차별있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도 있나? 차별한다는 것은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고, 순위를 매기면 맨 꼭대기에 있는 1등 말고는 행복할 수가 없다. 물론 뭐 내가 2등인데 나보다 잘난 1등 대신 나보다 못난 98명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 2등도 행복할 수는 있겠다(근데 너무 좀 별로니까). 어쨌거나 순위를 매기면 소수의 사람들 빼고는 모두 패배자가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한다. 페미니즘도 그렇다. '남자보다 여자가 잘났어'하는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성에 따라 차별하지말자'는 반차별주의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꾸려나가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가 다같이 행복하니까.

 

내 주변에 이런 페미니스트 언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까지 페미니즘에 ㅍ도 모르고 살았다. 책 읽고 토론하는 강의에서 아주 우연히, 난생 처음으로, 그동안 내가 살면서 겪었던 부당한 일 중 많은 것들이 여자라서 겪은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고 그 때 당시 남자친구와 그 문제로 자주 다투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정신 이상해보이는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ㅆㅂ'이라고 말하는 걸 겪고 정말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연애하고 소개팅하는 나 자신이 좀 한심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남자 자체를 싫어야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나보다. 그 때 좀 깨어있는 언니가 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개인의 가치관 정립은 스스로하는 거지만.

 

 

나도 이런 주치의가 갖고 싶다

 

맨 처음 이 연한 주황색 책 표지를 보면서 '음... 명랑한 시골 의사이야기군'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완전 틀렸다. 그녀는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다. 그리고 '왕진'은 그렇게 명랑하기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지하고 무겁다. 누구보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집 밖으로 단 한 걸음조차 나갈 수 조차 없는 환자들을 위한 일이다. 살면서 제일 서러울 때를 꼽으라면 그건 혼자 아플 때가 아닌가. 원래 건강한 사람이 그 때만 아픈 거면 119를 불러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갈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 나아서 건강히 걸어 돌아오겠지. 하지만 원래 아픈 사람은 병원 갈 때야 119불러서 간다고 해도 돌아올 때는 돈을 주고 응급차를 타고 돌아와야 한다.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그 돈을 누가 내나? 돈이 많았으면 병원에 입원해있었겠지. 4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혼자 걸을 수도 없다. 보호자는 환자를 간호하면서 동시에 생계를 꾸려야 한다. 아픈데 병원에 갈 나갈 엄두가 안나는 것이다. 그럴 때 의사가 와주는 게 왕진이다. 신성한 일이다. 보통의 사명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환자, 보호자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의료인이다.

 

그냥 한 사람으로서도 참 재밌다. 그녀가 검도 시합에 나가 기상천외한 기합을 내지른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한참 웃었다. 너무 귀여웠다. 환자들과 목욕탕에서 만난 일이며 코딱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며 아파트 단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족들과의 대화까지 읽고 나니 이 사람 진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런 주치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짧은 감상평

의료인으로 산다는 건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보람찬 일이구나를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장을 넘길 수록 이 사람한테 빠져버렸다. 의사로서도 멋있고 그냥 한 사람으로서도 멋있다. 검도대회에서 낸 기상천외한 기합소리며 코딱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며 허당스러운 모습에 빵 터지게 했다가 항상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하다. 진심으로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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