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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

by 헹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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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제목인 '싯다르타'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아닌, 그와 동명이인인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싯다르타는 바라문(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누구보다 건강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 바라문의 젊은 여자들, 친구 고빈다까지 모든 사람이 그를 사랑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었지만, 자신은 스스로에게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슬퍼했다. 그러던 어느날 싯다르타는 마을을 지나가는 사문*들을 보고 그들의 볼품없는 행색 뒤에 흐르는 '자기 초탈'의 향에 이끌려 출가를 결심한다. 그날 저녁 싯다르타는 반대하는 아버지를 고집적으로 이겨내고(노년 싯다르타와 아들 관계에서 이 장면이 다시금 떠오르게 됨. 인생의 회전목마..) 사문들을 따라나섰다. 친구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따라나섰다.

*바라문이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사제 계급으로 시인, 학자, 정치가의 일을 맡아 다른 계층으로부터 존경을 계급이다.
*사문이란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사람이란 뜻으로, 머리를 깎고 떠돌아다니며 도를 닦는 탁발승을 말한다.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사문 생활을 3년 정도 하였을 때, 싯다르타는 침잠과 단식 그리고 명상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고통, 굶주림, 갈증, 피로와 권태를 극복함으로써 자기 초탈을 하지만 비록 자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는 해도 그 끝은 언제나 자아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사문 생활을 계속해봤자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깨달음을 완성한 자, 부처(고타마 싯다르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떠난다. 부처는 정말로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평온했고 거룩했다. 둘은 부처의 설법에 크게 감동했으며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따라 다시 편력의 길을 계속 했다.

 

〈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생각하였다. 〈이제 다시는 나한테서 이 싯다르타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이제 다시는 나의 생각이나 생활을 아트만이나 세계고(世界苦) 따위로 시작하지 말아야지.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죽이거나 산산조각 내어, 그 파편 뒤에 있는 비밀을 찾아내려고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다시는 요가 베다의 가르침도, 아타르바베다의 가르침도, 고행자의 가르침도, 그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p62

 

싯다르타는 부처와의 대화를 곰곰히 회상하며 그동안 감각이라는 비본질적인 자기를 죽이고 사고와 학식이라는 또 다른 비본질적인 자기를 살찌웠으나 결국 어떠한 목표에도 다다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감각과 사유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경기되거나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두 가지의 가장 내밀한 소리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 도시로 갔다. 강을 건너면서 2부가 시작된다.

도시로 간 싯다르타는 첫눈에 카말라를 사랑하게 되었다(진짜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첫 눈에 반했다). 카말라는 아름답고 돈도 많은 기생이었는데, 딱 봐도 볼품 없어보이는 싯다르타에게 '날 만나려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지갑에는 돈도 두둑해야하고, 날 위해 선물을 해야 하는데, 너는 뭘 가지고 있니?'라고 물었다. 싯다르타는 "나는 사색할 줄 아오. 나는 기다릴 줄을 아오. 나는 단식할 줄을 아오" 라고 답했다. 왠지 웃겼지만 곧바로 진짜로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알면 다른 게 더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말라가 또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냐고 묻자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 시 한 편을 지어주었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에 아름다운 카말라가 들어섰고,
그 정원 입구에 갈색으로 그을린 사문이 서 있었네.
연꽃 같은 그녀를 보았을 때, 그가 구벅
몸을 숙여 절하자, 미소지으며 카말라 답례하였네.
신들에게 자신을 바치느니, 그 젊은이 생각하였지, 차라리,
아름다운 카말라에게 자신을 바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으리.
p87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지은 시가 마음에 들었고, 싯다르타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도시의 부유한 상인인 카와스와미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카와스와미로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고, 카말라로부터 사랑의 기술을 배웠다. 여기서 인상 깊은 구절 하나가 나온다. 맨 처음 싯다르타가 카말라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자신이 강제로 당신을 겁탈할 수도 있는데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카말라가 한 말이다.

 

사랑이란 구걸하여 얻을 수도 있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있고, 선물로 받을 수도 있고, 거리에서 주워 얻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강탈할 수는 없는 거예요. p86

 

대게 사람들은 사랑은 구걸해선 안 되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왠지 꼽씹게 된다. 사랑이란 구걸하여 얻을 수도 있고, 돈을 주고 살 수고 있고, 선물로 받을 수도 있고, 거리에서 주워 얻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강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싯다르타는 속세에 있으면서도 속세의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월감은 점차 잠잠해졌으며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노름과 탐욕에 빠지고 말았다.

 

지치고 지겨운 기색이 마치 너울처럼, 마치 엷은 안개처럼 싯다르타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그 기색은, 서서히, 날이 갈수록 약간씩 더 짙어지고, 달이 갈수록 약간씩 더 칙칙해지고, 해가 갈수록 약간씩 더 묵직해졌다. 마치 새옷이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빠지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아름답던 색깔을 잃어버리고, 얼룩이 생기고, 주름이 잡히고, 솔기가 닳아 해어지고, 여기저기에 해어진 자국과 꿰맨 자국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고빈다와 작별한 후 시작하였던 싯다르타의 새로운 삶도 낡아빠지게 되고,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색깔과 광택을 잃어버리고, 얼룩과 주름이 쌓이고, 환멸과 역겨움이 그 밑바닥에 숨은 채 여기저기에 이미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p115

 

그러던 어느날 그는 경고의 꿈을 꾸었고 그때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자기가 이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다시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 강가에 비친 자신에게 침을 뱉었고, 죽으려고 했으나, 섬광처럼 귓가에 울린 <옴>을 듣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싯다르타가 옴을 웅얼거리다 잠에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그의 오랜 친구 고빈다가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자들이 입는 옷과 신발을 신고선 순례하고 있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의심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답했다.

 

"옳은 지적이야, 이보게, 자네는 관찰력이 참 좋군. 자네의 예리한 눈이 모든 것을 간파해 버렸군. 그렇지만 자네한테 내가 사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어디까지나 순례하고 있다고 말했을 뿐. 사실 그대로야. 나는 순례하고 있어" p135

 

고빈다와의 짧은 만남 뒤에 싯다르타는 자신이 여전히 자신의 오랜 친구 고빈다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싯다르타는 이 강물 속에 오늘 빠져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싯다르타는 이 흘러가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꼈으며, 강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문득 예전에 자신을 도시로 태워준 뱃사공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그동안 자신이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바주데바는 이를 귀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강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강이 하는 소리를 듣기로 결심하며 바주데바의 나루터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두 뱃사공의 초연한 모습 덕분에 나루터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당신도」 싯다르타가 한 번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바주데바의 얼굴이 밝은 미소로 가득 찼다.
「그래요, 싯다르타」 그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前生)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梵天)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p157

 

몇 해가 흐르고 부처인 고타마가 위독하여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하고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이들이 부처를 향한 순례길에 올랐다. 카말라도 그의 아들과 함께 순례길에 나섰으나 잠깐 쉬는 사이 뱀에게 물려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은 바주데바가 카말라를 나루터로 데려왔다. 싯다르타는 단숨에 카말라를 알아보았다.

 

"여보, 당신 늙으셨군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머리카락이 다 하얗게 세었군요. 그러나 당신의 모습은, 그 옛날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잔뜩 먼지가 묻은 발로 나의 정원 안으로 들어도던 때의 그 젊은 사문의 모습과 닮았어요. 지금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나와 카와스와미를 버리고 떠나던 때의 모습보다도 젊은 사문 시절의 모습과 훨씬 더 닮았어요. 싯다르타, 눈매가 젊은 사문 시절의 눈매와 비슷하군요. 아, 나도 늙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늙어버렸는데도 나를 알아볼 수가 있었나요?"
싯다르타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사랑하는 카말라, 나는 당신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소."

 

카말라와 싯다르타의 재회 장면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참 뭉클했다. 그 옛날 자신을 찾아왔던 볼품없는 젊은 사문의 싯다르타,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탐욕의 싯다르타, 그리고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가 겹쳐 보였을 카밀라의 시선이 내게도 보이는 듯했다.

결국 카말라는 이 아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후 눈을 감는다. 싯다르타는 갑작스럽게 아들이 생겼지만 기쁘게 맞이했고 바주데바도 그의 아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아들은 도시의 생활에 익숙한, 버릇없는 아이였다. 싯다르타는 아들의 버릇없음도 참고 사랑했으나 결국 아이는 도시로 도망쳤다. 싯다르타는 아이를 찾아오고 싶었고 단지 한 번이라도 보고싶어 도시의 정원까지 찾아갔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어리석은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다.

 

싯다르타는 자기 아들이 옴으로써 자기에게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 걱정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년을 사랑하였으며, 그 소년이 없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느니 차라리 그 소년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겪고 사랑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p171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번뇌와 고통과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줄 수는 없을 겁니다. p177

 

작년에 하동으로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우리는 티 코스 체험을 갔었고 차 내주시는 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 분이 한 번은 딸이 자식을 안 낳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주변에 흔치 않은 생각이라 그 이유를 묻자 그게 다 업보라고, 자식을 세상에 내놓으면 걱정할 것도 많고, 그 걱정을 끊을 수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마음이겠지 싶었다. 아이 없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느니 차라리 아이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겪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대신 열 번을 죽어주고 싶은 것, 단지 예뻐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평생 사랑하고 또 평생 걱정할 것이 생기는 것. 그래서 무서운 것 같다.

아무튼, 그 후로 싯다르타는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는 많은 여행자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런 일들을 이제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p189

 

그러던 어느날 싯다르타는 강의 웃음소리를 듣고 강물 속에는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자기가 예전에 알았던, 사랑하였던, 또한 두려워하였었던 어떤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자기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의 대화를 통해 강의 소리를 더 잘 듣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바주데바는 환한 빛이 되어 숲속으로 떠났다.

노승이 된 고빈다는 순례길에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와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고빈다는 언제나처럼 싯다르타의 사상을 궁금해했고 싯다르타는 언제나처럼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밤새 대화를 나누며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바보같은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눈빛과 몸에서 부처 고타마와 같은 거룩함이 풍기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었던 모든 것들이 떠올랐고 고빈다가 싯다르타에게 절을 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겁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리하여 세존 고타마께서도 이 세상에 대하여 설법을 하실 때에, 이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달리 어떤 방법이 없지. 가르치고자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으로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p206

 

한 개의 돌멩이를 나는 사랑할 수 있어, 고빈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 또는 나무 껍질 한 개도 사랑할 수 있고. 그것들은 사물이며, 그리고 우리는 사물을 사랑할 수가 있지. 그렇지만 나는 말을 사랑할 수가 없지. 그 때문에 나에게는 가르침이라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아무런 부드러움도, 아무런 색깔도, 아무런 가장자리도,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맛도 갖고 있지 않아.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p211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p214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싯다르타라는 한 소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싯다르타는 자기초탈과 세속 사이에서, 감각과 사유 사이에서, 가르침과 깨달음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가 얻은 결론은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강'을 중심으로 보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강에 따라 싯다르타 삶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기 전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아들이자 사문이었고, 강을 건넌 후 싯다르타는 속세의 상인이었다. 강을 건너기 전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자기를 벗어나고자 수련하는 고행자였으나, 강을 건넌 후 싯다르타는 사랑과 탐욕에 찌든 권태로운 부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강의 뱃사공이 되어 강이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된다. 이처럼 깨달음은 자기초탈과 세속 사이에, 감각과 사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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