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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by 헹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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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즉 우리는 로봇 운반자들이다.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P7

유전자가 우리를 인형 끈으로 직접 조종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즉, 시간 지연 때문이다. P100

의식에 대해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든, 현재 우리의 목적에서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P107

미래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생존 기계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는 생존 기계보다 한 단계 앞서 있는 것이다. 시행착오 중 ‘시행’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들며, ‘착오’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은 보다 안전하면서 보다 신속하다.

메이너드 스미스가 생각한 또 하나의 전쟁 게임은 ‘소모전’이다. 이것은 위험한 싸움은 결코 하지 않는, 예를 들자면 부상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갑옷으로 덮인 종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종에서 싸움은 모두 전통적으로 정해진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싸움은 항상 어느 편이든 물러서면 끝난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가 등을 돌릴 때까지 자기 진지에 버티고 서서 적을 노려보기만 하면 된다. 위협하는 데 무한한 시간을 쓸 정도로 여유 있는 동물은 없다.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가 다투고 있는 자원은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을 리는 없다. 그것은 시간 가치가 어느 정도 있을 뿐이고, 경매에서 그렇듯 각 개체는 그 자원에 어느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려고 한다. 이 두 입찰자의 경매, 즉 소모전에서는 시간이 통화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 그가 얼마나 버틸지 상대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소모전에서는 내가 포기하려는 것을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염을 조금 움직이든지 하여 포기하려는 것이 들키면 즉시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왜냐하면 암컷은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의 형태로 처음부터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수태할 때부터 이미 어느 자식에 대해서건 아비보다 더 깊은 ‘정성’을 쏟는다. 자식이 죽을 경우 어미는 아비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암컷에 대한 수요가 있고 암컷이 짝을 선택하는 데 까다롭기 때문에 수컷은 밝고 화려한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이다. 풍조 암컷에 대한 수요가 있는 까닭은 난자가 정자보다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현대 서구인은 어떻게 된 것인가? 실제로 남성은 상대가 애써 찾는 성, 수요의 대상인 성, 신중하게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성이 되고 만 걸까?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순수하고 사심 없는 이타주의로부터 정말 먼 길을 걸어오긴 한 모양이다.

선견지명을 가진 자라면 서로 상대의 등을 긁어 주는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현명한 해결책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조심하라’고 배웠다.

바로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법칙이다.*

“(…) 밈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당신이 내 뇌에 기생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면서 그 유전 기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예컨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밈은 수백만 전 세계 사람들의 신경계 속에 하나의 구조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언뜻 보아서는 밈은 복제의 정확도가 높은 자기 복제자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게 마련이다.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 가지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기계다. 그러나 유전자 기계로서의 우리는 세 세대만 지나도 잊히고 말 것이다.

윌리엄스의 말마따나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이나 있는가. 하지만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마르코니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이 어느 카드를 내든 간에 나의 최선의 수는 항상 배신 카드를 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생활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활까지도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두 번은 봐준다Tit for Two Tats

TFT와는 달리 항상 협력하는 전략은 항상 배신하는 전략처럼 못된 전략의 침입에 대해 안정적이지 못하다. 항상 배신하는 전략은 항상 협력하는 전략을 이긴다. 매번 배신에 대한 유혹의 고득점을 얻기 때문이다.

칼날을 건너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방향성을 갖지 않는 자연의 힘이 어쩌다 칼날을 건너도록 이끌 때만 칼날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게임 이론가는 게임을 ‘영합 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으로 나눈다. 영합 게임에서는 한쪽 선수의 승리가 다른 쪽 선수의 패배가 된다. 체스는 영합 게임이다. 왜냐하면 각 선수의 목적은 상대에게 이기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쪽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는 비영합 게임이다.

‘개체선택’이냐 ‘집단선택’이냐에 대한 논쟁은 누가 운반자가 될 것이냐에 대한 진정한 논쟁이다. 그러나 개체선택이냐 유전자선택이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전자와 생물 개체는 서로 다른 상호 보완적인 역할, 즉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답을 생각하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병목형’ 생활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제도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지 말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즉 선재조건에 달려 있다.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성 간에 초기에 존재했던 미미한 차이가 스스로 그 차이를 점점 늘리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선택이 처음의 미미한 차이에서 시작해 점점 그 차이를 벌려 놓으며, 이는 A가 오늘날 우리가 수컷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고 B가 암컷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초기의 차이는 무작위로 생겨날 수 있을 정도로 작아도 된다. 어쨌든 두 성의 초기 상태가 정확히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자연선택만이 판단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믿음은 사람들이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그야말로 아무거나)을 믿게 만드는 심리 상태다. 만약 확고한 근거가 있다면 믿음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근거만으로도 사람들은 믿게 될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된다. 마치 당신이 축구 도박에서 재미를 못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길 수 있는 것과 생길 수 없는 것을 판단할 때 우리는 1억 년이라는 세월을 다루는 데 익숙해 있지 않다. 만약 수억 년 동안 매주 축구 도박에 돈을 걸면 분명히 여러 차례 횡재할 수 있을 것이다. P42

문제는 쌍방의 실패에 대한 대가가 같지 않다는 점이다. 뻐꾸기의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하는 데 실패하여 손해를 보는 유전자는 울새나 바위종다리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양부모를 노예로 만드는 데 실패하여 손해를 보는 유전자는 뻐꾸기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처음부터 존재한 불공정’과 ‘실패한 대가의 비대칭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솝 우화의 한 부분에도 요약되어 있다. “토끼는 여우보다 빠르다. 왜냐하면 토끼는 목숨을 걸고 달리지만 여우는 식사를 위해서 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동료인 크렙스와 나는 이것을 ‘목숨/식사 원리’라고 명명했다.

유전자의 용어로 말하면 형제를 살해하는 개체의 몸 속에서 형제 살해를 촉구하는 유전자는 100% 확률로 존재하는데 희생이 되는 개체 속에는 50%의 확률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제 살해를 촉구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퍼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20

그러나 동식물을 통하여 수컷을 수컷, 암컷을 암컷이라고 명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특징은 수컷의 성세포, 즉 배우자gamete(생식세포)는 암컷의 배우자에 비해 매우 작고 그 수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동식물 어느 것을 취급할 때도 마찬가지다. P231

그 시간의 약 반을 수컷의 몸, 나머지 반을 암컷의 몸속에서 지낸 셈이 된다. 유전자 효과 중에는 한쪽의 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이를 ‘한성sex-limited 유전자 효과’라고 한다. 페니스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수컷의 몸에서만 효과가 나타난다.

자연 선택은 대형의 배우자를 융합 상대로 활발하게 찾아다니는 소형의 배우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양쪽으로 벌어진 성의 ‘전략’의 진화를 상상할 수 있다. 우선 대투자 전략 또는 ‘성실한’ 전략이 있었다. 이 전략은 소투자 착취 전략의 진화에 스스로 문을 열었다. 이 두 전략의 분리가 시작되면 이 경향은 일방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P233

선견지명을 가진 자라면 서로 상대의 등을 긁어 주는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현명한 해결책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조심하라’고 배웠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친절 행위와 이에 대한 보답 사이에 시간차가 있는 상황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은 서로 등을 긁어 주는 관계, 즉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윌리엄스는 이미 언급한 1966년의 저서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였다. 그는 다윈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연된 호혜적 이타주의는 서로를 개체로서 식별하고 또 기억할 수 있는 종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
잠시나마 책 편식을 깨기 위해서 읽기 시작했으나 읽으면서 몇 번이나 접을까 고민했던 책. 밑줄이 넘 많아서 여기 다 올라가지도 않는다. 이해도가 무릎 수준이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평소에는 생각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들 몇 가지가 남는다.
1. 나는 생존기계일 뿐이라는 점.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전부인 철학의 세계에 살다가 갑자기 유전자의 운반자 또는 생존기계일 뿐인 과학 세계에 굴러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런 걸 소외감이라 하나.
2. 밈의 존재
3. 인생은 정말 죄수의 딜레마 게임 같다. 그것도 선재 환경에 대한 파악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하는 게임. 항상 배신하는 전략이 안정적인 전략이라는 걸 알았을 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제 이걸 알게 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4. 소모전. 한정된 시간의 가치를 두고 겨루는 싸움. 도킨스가 소모전을 언급한 부분에서 난데없이 나는 내 전쟁의 방식을 전면전에서 소모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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