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일하고, 사랑하며, 죽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질문: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 지루한 상태로 시간을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며칠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강연에 귀를 기울일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기차의 코스를 골라 서서 여행할 것. 공연장의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표는 사지말 것 등등
어리석음이란 늘 끈질긴 것이므로,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순간이 결국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오랜 나날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숙고하고 번민하던 것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이미지는 기다림과 정열을 불 속에서 오래 간직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상대방은 그것에 대해 상투적인 감동이나, 시장에서도 살 수 있는 흔한 고뇌, 혹은 대량 생산되는 상품처럼 평범한 우울증이라고 상상했다.
고통이 고통인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동정심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니, 아마도 신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침묵하고 있는 그곳 하늘을 향해 우러러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100년 전에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 페스트가 퍼져서 모든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시체를 씻는 사람만은 살아남았답니다. 전혀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도 말이예요.”
“그는 3분의 1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죠, 그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거의 언제나 무지함에서 비롯되며, 또 선의도 교양을 갖추지 못했다면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인간은 악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다소 무지한 법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무지다. 무엇보다 자신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이성이 마비된 상태이며, 최대한의 통찰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참된 선도 참된 사랑도 없다.
천만에,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해야지.
그것은 마치 바다에 떨어뜨린 물 한 방울과 같았다.
그 이튿날 가족들은 기록부에 서명을 하도록 호출되는데, 이 점은 가령 사람과 개 사이에 있을 수 있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죽음은 늘 확인되고 기입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얼굴, 그 웃음,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 행복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어떤 하루 등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그려보는 바로 그 시간에, 또한 그 후로 그렇게 먼 곳이 된 그 장소에서 상대방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미래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한데, 이제는 현재의 순간들밖에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는 눈을 뜬 채 잠자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이 눈알을 잃었을 때,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을 잃거나 그렇지 않으면 눈알이 빠진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파늘루 신부님은 신앙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그는 갈 데까지 가실 거예요. 그가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성직자들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으니까요.”
죽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일 년에 한 번 그들 무덤에 찾아가 그동안 버려둔 것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버림받은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잊어버리고 싶은 불청객이었다.
페스트가 그 임무로 우리에게 가져다준 효과적인 공평함 덕분에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확고히 심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와 반대로 이기주의의 당연한 발동으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의에 대한 감정만 더 강렬해지도록 만들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끌어내는 일 자체만 생각했기 때문에, 끌어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하지만 파리와 가려움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하늘과 별의 온 무게를 싣고 그 두 사람에게 다시 떨어졌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의 도박에서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인식과 기억뿐인 셈이다. 아마도 타루가 내기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나보다!
📝
이방인을 읽으면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알베르 카뮈의 매력을 느꼈다. ‘추억의 달콤한 불안’ 같은 묘사가 나를 그랑처럼 만든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진짜 너무 좋다.
페스트가 인생이라면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해나갈 것인가 절대적 운명 또는 신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나의 도피처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신념과 함께 반항할 것인가? 곱씹어 볼수록 너무나 철학적인 소설이다.
답은 모르겠다. 내 삶을 이끌 뚜렷한 가치관을 원하지만 나는 나의 무지함을 인식이나 하고 사나. 무지에서 악이 비롯된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감한다. 죄책감이 드는데 이런 느낌조차 너무 허영 되고 가짜 같아서 더 그렇다. 나의 무지함으로 비롯되는 실행되는 악은 또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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