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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by 헹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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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

근대 이성주의가 붕괴한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체제 경쟁을 앞세운 냉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파편회되고 불안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등장했다. 원래 실존주의는 19세기에 키르케고르와 야스퍼스 등에 의해 앞서 제시되었던 사상적 조류였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은 20세기 프랑스에서 열정적으로 활약한 사르트르였다. 그는 실존주의를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눠, 키르케고르를 전자에 배치하고 자신은 후자에 배치했다. 이러한 구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와 작가,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이 실존주의자로 분류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오늘날 실존주의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우리는 각가의 사상가들을 알아보는 대신 이들의 공통점만 추려서 실존주의의 개념을 알아보고자 한다. ‘실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존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의자, 돼지, 인간의 세 존재자를 구분해보자.

존재
-본질 : 의자
-본질 : 돼지
-실존 : 인간

우선 의자는 본질로서 존재한다. 의자의 본질은 단적으로 말해서 ‘앉는 것’으로, 이것은 개별적인 의자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 의자의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서 ‘앉는 것’이라는 본질을 아예 상실한다면, 나는 그 의자를 폐기할 것이다. 의자에는 본질이 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마찬가지로 돼지도 본질로 본재한다. 돼지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물론 돼지는 이게 무슨 말이냐며 동의하지 않겠지만, 현실의 돼지는 반대 의사를 개진하지 않으니 원래 하던 대로 우리가 대신 규정하기로 하자. 만약 특정 돼지가 병에 걸려 못 먹게 되었다면, 그 돼지는 본질을 상실했으므로 우리는 돼지를 살처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재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신의 피조물’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직립 보행하는 존재’인가? 이 물음은 서구 역사에서 오랜 시간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본질을 상실하면 인간을 파기할 만한 본질은 찾을 수 없다. 지능이 낮거나 생각이 서툴러도 그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가치가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인간은 가치가 있다. 다리를 잃어 직립보행을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즉, 인간은 의자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규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을 억압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가족, 관습, 도덕, 종교, 철학, 과학은 우리를 본질로 규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국민’으로, ‘아들과 딸’로, ‘피조물’로, ‘이성적 존재’로, ‘회사원’으로, ‘학생’으로 규정되어왔고,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니며, 나의 본질을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로 존재하지 않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다”라도 말했다. 여기서 저주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의 숙명에 대해 강조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나, 지금, 여기


기존의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는 실존주의 사상은 1968년 유럽의 68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고, 탈근대적이고 탈이념적인 포스트모던의 도래를 가능하게 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2>, 채사장,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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